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수아 2세 (문단 편집) === 앙부아즈의 음모 사건 === 프랑수아 2세가 이런 상황이라 그의 아내 메리 여왕의 외삼촌인 2대 기즈 [[공작(작위)|공작]] 프랑수아 드 로렌과 로렌 [[추기경]] 샤를에 의해서 국사가 운영되었다[* 1559년에 일어난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사고사는 정치적 공백을 야기하여, 프랑수아 2세의 왕비인 메리 스튜어트의 어머니 마리 드 기즈 쪽 친족인 기즈 가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. 2대 기즈 공작 프랑수아 드 로렌은 칼레를 잉글랜드로부터 탈환한 전쟁영웅이었고, 그 동생인 로렌 추기경 샤를은 프랑스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, 매우 독실한 가톨릭 교도였다. 한편 신교도들은 부르봉 가문의 당주인 나바르 왕 [[안토니오(나바라 왕국)|앙투안]]을 맹주로 추대했지만 그는 열성적인 신교도 아내인 나바르 여왕 [[잔 달브레]](나바르 왕비 마르그리트의 딸)에게 주도권을 내어 준 유약한 인물이었다. 이에 다시 동생인 콩데 대공 루이 드 부르봉이 신교도들의 중심이 되었다.]. 이들이 큰 권력을 가지게 되자 [[나바르]] 여왕 [[호아나 3세|잔 달브레]]와 그녀의 부군인 [[안토니오(나바라 왕국)|방돔 공작 앙투안]][* 훗날 [[앙리 4세]]가 되는 앙리 드 부르봉의 아버지이다.] 및 그의 아우인 콩데 공작 루이 등은 [[위그노]] 귀족인 라 노르디를 중심으로 한 불평귀족들과 손을 잡고 어린 왕을 꾀어 내어 기즈 집안을 공격할 것을 약조했으나, 1560년 3월 17일 시행 직전에 발각되어 수백명의 관련자들이 처형되거나 구금되었는데 이 사건을 '''앙부아즈의 음모'''라고 부른다. 기즈 형제는 부르봉 가문의 콩데 대공 루이가 흑막이라고 의심했다. 콩데 공은 11월에 체포되었는데 이 일로 양측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. 12월 오를레앙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위그노에 대한 심한 규제가 통과되었고 콩데 공작은 [[사형]]을 언도받았으나, [[귀]]에 발생한 농양으로 프랑수아 2세가 1560년 12월 5일 요절하는 바람에 콩데 공작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. 위그노들은 가톨릭 교회의 성상(聖像)을 1560년 북부의 루앙과 서부의 라 로셀에서 처음으로 파괴했는데, 프랑수아 2세가 죽은 후인 이듬해(1561)에는 20개의 도시에서 위그노들이 성상을 부수었다. 이에 격노한 가톨릭 도시 주민들에 의한 유혈 복수가 상스, 카올, 카르캉느, 투르 등 각 도시에서 발생했다. 왕태후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퐁텐블로에서 자문회의를 소집하여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화합을 의도했지만 기즈 가문은 이단자는 모두 숙청해야 한다는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. 선왕 [[앙리 2세]]의 정부 [[디안 드 푸아티에]]에게 억눌려 있었던 모후 [[카트린 드 메디시스]]가 프랑수아 2세의 재위 기간을 기점으로 권력 장악에 나섰다. [[분류:프랑스 국왕]][[분류:발루아앙굴렘 가문]][[분류:1544년 출생]][[분류:1560년 사망]][[분류:스코틀랜드 국서]][[분류:생 드니 대성당 안장자]][[분류:퐁텐블로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